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스니아 전쟁 (문단 편집) === 전쟁의 시작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붕괴·분열 과정에서 가장 잔인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전쟁]]이 벌어진 곳은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도 [[크로아티아]]도 아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였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보스니아가 최약체였고, 어느 정도 국내 민족 구성이 지역을 단위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와 달리 보스니아는 [[이슬람]](보슈냐크계) - [[가톨릭]](크로아티아계) - [[정교회]](세르비아계) 신자들이 한 지역 내에서도 뒤섞여 [[통혼]] [[혼혈]]하며 살았기 때문. [[유고슬라브인]]은 통틀어서 [[남슬라브]] 민족으로 사실 [[크로아티아]]부터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에 이르기까지 언어는 표기 문자만 다르지 똑같았고, 이들을 구분하는 단위가 바로 종교였다. 즉, '''종교를 배경으로 [[민족]]이 쪼개져 버린 것이다.''' 이런 유고전의 특수성 때문에 보스니아 전쟁은 초기부터 종교 전쟁으로 흘러가, 자기 종교가 아닌 타 종교 인원들에 대한 집단 [[학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민주화]] 조치를 단행하여 [[1990년]] 각 [[구성국]]에 자유 총선을 시행했다. [[1990년]] [[https://en.wikipedia.org/wiki/1990_Bosnian_general_election|보스니아 총선 결과]],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민주행동당(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민주행동당]]([[이슬람]])이 31.1%,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민주당(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 민주당]]([[정교회]])이 26.1%,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가톨릭]])이 16.1%, 보스니아 공산당이 12.3%, [[유고슬라비아]] 개혁연합이 8.9%를 얻었다. [[1990년]] 총선 결과가 곧 [[내전]]의 시작이나 다름이 없었다. [[1991년]]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방 탈퇴로 시작된 연방 내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연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youtube(i31XsfIsoas)] [[1991년]] [[10월 14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의회에서 벌어진 [[라도반 카라지치]](세르비아 민주당)와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민주행동당, [[보슈냐크인]])[* 카라지치와 이제트베고비치는 [[1990년]] 이전까지는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 둘은 통념과 달리 오히려 많이 친했는데, 반 공산당 투쟁을 같이 이끌었다. 그러나 1990년 [[동유럽 혁명]]에 휩쓸리면서 서로 비난의 강도가 점점 강해졌다.]의 비방전. 카라지치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겠다고? 어디 독립 선언 한 번 해 봐라. [[무슬림]]은 자기네를 지킬 힘이 없으니 [[내전]] 나면 다 죽여버리겠다."라고 대놓고 위협했다. 대놓고 [[세르비아인]]들이 [[보슈냐크인]]에 대한 [[학살]], 공격에 나서라고 하는 부분이다. 이에 이제트베고비치는 "[[세르비아인]]들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들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유고슬라비아]]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희가 아무리 무슬림들을 공격해도 무슬림 사회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이때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들인 [[슬로베니아인]]([[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인]]([[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인]]([[북마케도니아]]), [[알바니아인]]([[코소보]]), [[헝가리인]]([[보이보디나 자치주]]), 무슬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유고슬라비아 전체)을 직접 언급한다.[* 유고슬라비아 치하에서 무슬림(Muslimani / Муслимани)이라는 용어는 연방 내 슬라브 무슬림 모두를 포괄하는 민족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치하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발언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6px-Ethnic_Composition_of_BiH_in_1991.gif]] ▲ 1991년 전쟁 발발 이전 당시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구성. 알기 쉽게 정리하자면 빨강색 계열이 세르비아계(정교회), 초록색 계열이 보슈냐크계(무슬림), 파랑색 계열이 크로아티아계(가톨릭)이며 하얀 선 동편이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던 지역이다. 아래의 흰 선이 데이턴 협정으로 확정된 양 세력 간의 경계이다. 경계선 동쪽 세르비아계 영역에 다수 거주했던 보슈냐크인들이 주된 희생자가 되었으며, 이후 세르비아계의 영역 확장으로 원래 크로아티아-보슈냐크계 지역이었던 곳들도 큰 전쟁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이전의 분쟁 지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각각의 분쟁 양상은 판이하였다는 점이다. [[슬로베니아]]는 민족 분포가 각각 슬로베니아계(90%)로 세르비아계의 비율이 적었으며, 크로아티아의 경우 크로아티아계(89%)가 다수였지만 세르비아계도 소수 정도나마 분포하고 있었으면서도 두 민족 간의 주거 지역도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어[* 주로 세르비아와 인접한 부코바르 등 동부 지역과 크닌 등을 비롯한 크로아티아 중부 지역에 세르비아계의 분포 비율이 높았다.] 전쟁의 성질이 지역 내 민족 분쟁보다는 사실상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의 전선 쟁탈전이었다. 이와는 달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교]]를 믿는 [[보슈냐크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이라는 세 [[민족종교집단]]이 일정한 주거 지역이 없이 내부적으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서 분포하고 있었다. 보스니아의 분리 독립에도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했으나 세르비아계가 반대하면서 분란이 격화되었다. 결국 긴장이 고조되어가던 1992년 1월 9일 세르비아계가 [[스릅스카 공화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인 공화국]]을 선포했고[* 처음에는 SAO 보산스카 크라이나, SAO 헤르체고비나, SAO 로마니아 등 SAO(사라예보 자치주)로 독립했으나 이후 하나로 통합된다.]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 이틀에 걸쳐 연방 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의 분리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세르비아계가 투표를 보이콧한 가운데 전체 투표율 64%, 독립 찬성 99.7%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근거로 3월 3일 보스니아 인구의 2/3를 차지하던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며 유고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나머지 세르비아계가 이에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3월부터 4월까지 각 지역에서 세 민족 간 소규모 충돌이 일어난다. 연방의 주도국이었던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1992년]] [[3월 10일]] 유고슬라비아의 정부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보스니아에서 철수시키고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는 철저한 [[기만]]술이었다. 인민군은 철수했지만 [[1992년]] [[3월]]부터 [[4월 6일]] [[라도반 카라지치]]의 세르비아계 괴뢰국인 [[스릅스카 공화국]] 건국 선언 직전까지 보스니아로 무단 월경을 하여 카라지치 산하의 세르비아계 민병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 [youtube(Fhe7MoEc9MQ)] || || [[미군]]과 [[러시아군]]의 보호 하에 마을을 떠나는 150명의 보슈냐크인들. [br] 그 주변을 400명의 세르비아계 청년들이 둘러싸고 위협하고 있다. [br] 러시아군 사령관은 100m 간격을 두고 두 집단이 충돌하지 않게끔 갈라 놓았다. || 마침내 운명의 [[4월 6일]] 미국과 유럽 공동체(EC, 이후 [[유럽 연합]])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보스니아의 연방 이탈이 사실상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되자 이와 동시에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라도반 카라지치]]는 미국과 유럽 공동체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 승인을 확인하고, [[4월 6일]] 14시(현지시간) 연방[*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인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발족은 1992년 4월 29일이었므로 아직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SFR Yugo)이었다.] 주도국인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원 하에 [[세르비아]] 접경 도시인 팔레(Pale)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인 공화국의 이름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8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뗀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렇게 카라지치는 봉기를 일으키고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민족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의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스릅스카 정부군 및 민병대를 활용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전쟁 초반에는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가 함께 세르비아계에 대항하는 양상을 띄었으나[* 심지어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이전인 [[제2차 세계 대전]] 때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점령기에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 등 [[추축국]] 세력들의 지원 하에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국내의 세르비아계들을 학살, 탄압한 이력이 있다. 자세한건 [[우스타샤]], [[실향민]], [[한트샤르]] 문서 참조.] 시간이 지나면서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 역시 각자 장악한 지역의 통제권과 전쟁 범죄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자체적인 공화국인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Hrvatska Republika Herceg-Bosna)을 수립하고 궁극적으로 크로아티아와의 통일을 노린 크로아티아계와 이를 거부한 보슈냐크계가 서로를 공격하면서 상황은 더욱 막장이 되었다. 크로아티아계 지역을 노리던 크로아티아 역시 보슈냐크계에 대한 지원을 끊고 헤르체그보스니아를 지원해 보슈냐크계를 공격하였다. 결국 보다못한 미국의 압력으로 크로아티아가 굴복해 1994년 7월 [[워싱턴 협정]]과 스플리트 협정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 수립되면서 보스니아 전쟁의 하위 전쟁인 이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는 사상자가 1만 명 이상이 나왔는데 62%가 보슈냐크인이었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각각 24%, 13%였다. 이 전쟁 중에 크로아티아인들은 보슈냐크인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이 크로아티아인들을 지원한 크로아티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도 [[전쟁범죄자]]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61px-Bih94.jpg|width=496]] ▲ 전쟁 중기인 1994년의 인구 구성. 세르비아계(붉은색) 영역이 전범위로 넓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유일한 예외로 형제국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은 지도 남쪽의 크로아티아계(파란색) 영역이 일부 확장되었다. 보슈냐크인이 많았던 지역을 크로아티아계가 차지한 경우도 있다. 크로아티아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본국에서의 전쟁을 수행하기도 여력이 부족하여]] 세르비아를 제대로 막지 못한 탓에 세력 간 대치가 지루하게 이어졌고,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은 스릅스카군이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이 전쟁은 세르비아가 이하에 서술될 반인륜적인 전범 짓거리만 안 했어도 승리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전쟁이었다. 특히 이 학살은 보슈냐크계, 크로아티아계만 학살당한 것이 아니라 동족이었던 온건파 세르비아계도 학살한 것이 문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